책의 기억

J는 헌책 사기를 즐겼기 때문에 그의 책장은 고서로 가득했다. 수십 년 동안 한곳에 머물러 있다가 J의 단골 헌책방을 거쳐 이곳에 온 책도 있지만 어떤 책은 여러 번 자리를 옮기며 그 흔적을 갖고 왔다.

버건디색의 두꺼운 양장 책 한 권이 처음 읽힌 것은 부잣집 서재에서였다. 책의 기억은 주인이 첫 장을 펼치면서 시작된다. 그게 곧 탄생이니까. 부자는 앞에 석 장 정도 읽고 책을 덮었다. 서울로 이사할 때 부자는 많은 양의 책을 동네 도서관에 넘겼다. 그것도 기부라 쳐서 세금 낼 때 유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. 부자의 관심 밖인 책 여러 권이 도서관에 꽂혔다. 그 중엔 저 버건디 양장 책도 있었다.

한 아이가 도서관에 들러 그 책을 골랐다. 빌리면 열나흘 안에 돌려줘야 했는데 읽는 것이 느린 소녀는 제때 다 읽지 못했다. 하루는 기침이 심한 날이었는데 엄마는 방에만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. 열이 많이 오른 날이 며칠간 이어지면서 책은 작은 앉은뱅이책상 아래 밀려 들어가 잊혀졌다. 책이 다음 주인을 만났을 때는 소녀의 몇 안 되는 짐을 태우던 날이었다.

책에 찍힌 ‘OO 도서관’을 보고 엄마는 아랫집 최 씨에게 대신 가져다줄 것을 부탁하곤 동네를 떠났다. 최 씨는 아들에게 도서관에 갖다주라고 책을 건넸다. 아들의 친구들은 웬 책이냐며 관심을 보이다가 마지막 장에 붙은 대출증을 뽑아보았다. 빌린 책인데 날짜가 너무 오래돼 이제 가져가면 늦은 대가로 돈을 내야 한다고 한 친구가 말했다. 무리 중 가장 똑똑한 친구가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렸다 펼쳤다 하더니 연탄도 사고 비누도 살 돈이라며 한마디 덧붙였다.

아들은 겁이 났다. 글도 띄엄띄엄 읽는 내가 이 두꺼운 책을 빌렸을 리 없지 않냐며 사서에게 말하면 믿어줄까. 집에 돌아오는 길 부서진 리어카 밑으로 책을 살포시 숨겨버렸다. “니 참, 책 갖다줬제?” - “하무요.” 아들은 벌게진 얼굴을 그릇에 처박은 채 까끌한 밥알을 한입 가득 퍼 넣었다.

서재는 조용해 보이지만,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 책들의 대화로 시끌시끌하다. 나이 많은 책들이 모인 J의 서재는 특히 더 그렇다.

(책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한다면 어떨까하고 상상해서 써본 글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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